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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Jeep Story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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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숱한 스포츠는
대부분 사람과 도구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특정 도구를 사용하거나
혹은 몸을 이용해 특정 기술을 연마해,
나와 싸우고 기록과 싸우고
나아가 상대와 경쟁해야 한다.
하지만 도구를 사용하나 여느 스포츠와 달리
‘자연’이라는 천하무적을 상대로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경기가 있으니
바로 ‘서핑Surfing’이다.
절대 미리 예측하거나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바다에 승부수를 던진 국가 대표 서퍼 ‘조준희’와
그를 응원하는 든든한 지원군
Cherokee를 만나기 위해
춘설을 뚫고 강원도 양양으로 떠났다.

조준희 I 프로 서퍼
국가 대표 선발전
숏보드 부문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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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ving Wa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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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국내에서도
힙한 문화로 급부상 중인 서핑은
2020년 하계 올림픽 종목으로 정식 채택됐다.
선발전을 통해
‘국가 대표’라는
타이틀까지
당당히 거머쥔 프로 서퍼 조준희에겐
그가 애정하는 Cherokee가 있다.
서핑, 파도, 그리고 조준희의 Cherokee를 만나보자.
춘삼월에 눈이라니. 프로 서퍼 조준희를 만나기로 한 전날, 때아닌 강원 지방의 폭설로 자정까지 기상 속보가 이어졌다. 오도
가도 못하고 멈춰선 차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늘어선 모습을 보며 망설이지 않은 바 아니었으나, 일단
인터뷰를 감행하기로 했다.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며 달려간 강원도는 다행히 발빠른 제설 작업으로
길은 모두 뚫렸고, 봄눈 덕에 겨울 왕국을 방불케 하는 설경이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었다.
서울에서 동서를 가로질러 간 바다 끝 양양에서 만난 조준희는 하얀 눈만큼이나 순수하고 눈부신 미소를 가진 청년이었다. 폭설 뉴스에 잠시 인터뷰를 망설였던 게으른 마음이 민망할 정도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준희는 호주의 바다를 누비며 ‘주니 초 서핑 하우스’를 운영 중이었지만, 지금은 코로나의 여파로 호주 생활을 청산하고
그에게 인생 첫 파도를 내주었던 양양에 둥지를 틀었다.
저 멀리 호주에서 함께 온 길동무 Cherokee와 함께 말이다. 세상의 모든 널빤지를 정복하는 것이
꿈이라며, 서핑 보드 위에 섰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개구진 말로 대신하는 조준희는 꽤 긴 시간
동안 진지하게 그의 바다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하철 안에서 사무치게 바다가 그립고 파도가 고팠어요. 그가 처음으로
파도를 만났던 것은 대학교 1학년이었다. 스노보드 마니아였던
조준희는 날고 기는 보드 실력으로 서핑 보드에 몸을 실었지만, 매우 낯선 경험이었단다. 물 위에서는 분명 짜릿한 스피드를 느꼈지만, 정작 친구가 찍어준
영상 속의 자신은 너무 지지해 보였다고 했다. 그 와중에 우연히 잡아 탔던 파도 한 너울이 그의 뇌와
온몸에 각인된 것이 새로운 인생 시작이었다.
일상으로 돌아가 지내던 그는 어느 날 문득 붐비는 지하철에서
끊임없이 그를 자극하는 실체와 마주했다. 겨우 서 있을 수 있는 만큼의 비좁은 공간과, 오직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광활한 바다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주변을 맴돌았던 것은 다름 아닌 바다에 대한 그리움과 파도의 부름이었다. 곧바로 양양 죽도 해변의 서핑숍
일자리를 찾아 들어갔고,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는
신념을 가진 사장을 만나 그를 롤 모델로 삼게 됐다.
조준희의 말인즉슨, 자유로운 영혼으로 서퍼 인생을 사는 그분 덕에 틀에 박힌 인생이나 누군가 정해준 삶을 살 필요가 없음을 알았고, 하루하루 충실하고 만족스럽다면 그 또한 귀한 삶이라는 걸 배웠단다. 더불어
처음 서핑의 물꼬를 트게 된 그 인물과 그 장소 덕에 지금의 조준희가 있는 것이고, 취미나 스포츠로
즐기는 대신 업으로 선택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조준희와 서핑, 그들은
어차피 만날 운명이었나 보다.
서퍼들의 인생은 파도를 닮아가는 것 같아요. 나고 자라면서 한 나라를
벗어나기도 쉽지 않건만, 조준희는 독특하게도 프랑스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고 호주에서 일하는 소위
다국적 유목민 라이프를 살아왔다. 자연스럽게 5대양을 넘나들며
그의 사고력은 어느 한곳에 뿌리내리기보다 가지치기를 통해 새로운 곳을 향해 죽죽 뻗어 나갔다.
경영학과에
미련 없이 사표를 쓰고 파도를 찾아 발리에 정착하는가 하면, 호주의 전문 프로 서핑 기관에서 배움의
길로 정진하기도 했다. 이 과정이 말처럼 순탄하기만 할까. 부모님의
엄청난 반대와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고, 잠깐의 학교 생활에서 터득한 팀플의 기술로 ‘내 인생의 플랜’을 부모님 앞에서 발표했다. 지원은 물론 투자까지 당당히 요청하는 조준희의 설득은 다행히 제대로 먹혔고,
호주에서 급기야 평생의 은사로 손꼽는 서핑 선생님 ‘클레이튼 마크 니네버(Clayton Mark Nienaber)’를 만나기에 이르렀다.
한계에
부딪혀 방황할 무렵 클레이튼 선생님은 그에게 멘토다운 화두를 하나 던진다. ‘진짜 성공하고 싶다면, 누군가에게 서핑을 가르쳐라. 그래야 너도 성장할 수 있단다.’ 비로소 큰 깨우침을 얻은 조준희는 서핑 하우스를 운영하면서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겼다. 파도는 공격과 수비의 개념으로 대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 즉 서퍼는 파도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호흡을 맞추는 대상이기에, 그들의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을 터득하게 된다.
Cherokee에 올라탄 순간, 마치
배럴을 타는 기분이었어요. 그의 Cherokee는 99년식 2세대로 핸들도 우측 방향에 위치한 클래식 자동차로, 2년 전 호주에서 구입했다. 우연하게 마주친 Cherokee는 한순간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마침 시작한 서핑
하우스로 운좋게 목돈까지 쥐고 있던 찰나였다.
아, 조준희의
타이밍이라니. 다음날 바로 Cherokee는 그의 인생 첫
차가 되었다. 내친 김에 호주 태즈메이니아 주에 있는 세븐 마일 비치로 달려가, 길고 긴 모래사장 길을 시속 50km로 정신없이 질주했다. 바닷물을 튀기며 달리는 첫 드라이빙은 마치 큰 파도 속 배럴barrel을
타는 듯 짜릿했고, Cherokee 보드를 타고 서핑하는 느낌이 들었단다.
멋모르고 바닷물을 튀기며 달렸던 초보 드라이버는 엄청난 비용을 탕진해 차를 수리해야 하는 후폭풍을 맞긴 했지만, 그렇게 숱한 에피소드와 함께 Cherokee와 그는 한층 더 견고한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신형 Cherokee Trailhawk를
몰아본 후에도 부드럽고 조용하다며 칭찬하지만, 마음은 자신의 클래식한
Cherokee에서 조금도 기울지 않았다. 한참 스포츠카나 신차에 관심 많은 또래 청년들과
달리, 자신의 나이와 거의 비슷한 자동차에 마음을 뺏기고 애지중지 다루는 그는 왠지 마음이 바다처럼
깊고 넓어 보였다.
서핑과 Cherokee는 그냥 제가 지나온 발자취이고 흔적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후회’로 꼽는 조준희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서핑을 선택했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Cherokee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차를 처분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란 걸 알지만, 호주에서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데다가 단순히 자동차가
아닌 조준희의 작은 역사이기에 포기하지 않았단다.
‘ET’라는 애칭까지 붙여준 Cherokee는 소음도 너무 크고 고속에서 떨리기도 하고 내부 공간 또한 그리 넓지 않지만, 4L짜리 강심장에서 품어져 나오는 힘과 믿음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했다. 자신 또한 해외 프로 서퍼들의 신체 조건과 견준다면 밀릴 수 있으나 자존감을 잃지 않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지금의 조준희로 성장해 온 면에서 Cherokee와 동질감을 느낀다고 한다.
서로를 닮아 서로가 서로에게 애틋하니, 그에게는 서핑만큼이나 Cherokee도 숙명이었던 듯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트렁크 안에 항상 실려 있는 기초적인 자가 정비를 위한 커다란
공구 박스다. 오프로드든 온로드든 언제 어디서나 Cherokee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상 상황을 대비해, 직업 양성 학교 칼리지에서 차량 정비까지 배웠다니 이 정도면 찐Jeep 사랑 인정! 엄청나게 쌓인 봄눈에 모두 발이 묶였는데 눈 하나
깜짝 않고 달리는 Cherokee가 오늘 너무 고맙고 든든했다며 행복하게 웃는다.
제 서핑 경험을 바탕으로 스타트업도 시작했어요. 경험이 가장 큰 스승이라고
했다. 그는 서퍼로서 자신이 만났던 파도를 기록하면서 스스로 많은 도움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핑 일기 앱 ‘파도나무’를 개발 중이다. 정부지원사업으로 시작한 스타트업을 통해 이제 곧
앱 런칭을 앞두고 있다.
‘파도나무’는 기상이나 파도, 스팟 등의 정보성 서핑 관련 앱과는 달리, 서퍼들이 자신의 감정이나
파도에 대한 사적인 기록을 담는 앱이다. 다양한 형용사가 나열되는 파도와 그 순간의 기분과 감정을 곱씹으며, 이를 원동력으로 삼아 조준희표 서핑 실력을 쌓았다 하니 믿음이 간다. ‘서핑’이 운동의 개념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이 토핑처럼 올려진 특별한 스포츠로 성장하길 바라는 전문가의 마음이 뚝뚝
묻어난다.
또 조준희에게 ‘바다’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거울’이라고
답했다. 파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패들링 하는 동안 혼잣말을 되뇌이곤 하는데, 직접 볼 수 없는 자신의 내면을 비춰보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란다. 그렇다, 바다는 누군가에게는 흥미진진한 놀이터지만, 누군가에게는 깊은 깨달음의
도량인 것이다.
파도 밖에서도 저를 갖추는 서퍼가 되고 싶어요. 서핑은 ‘파도’라는 도화지에 자기 그림을 그려 나가는 행위로 봤을 때, 완벽한 그림을 위해 끊임없이 파도를 타는 것이라며,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고 싶다는 조준희에게 구체적인 미래를 물어봤다.
먼저
Cherokee와 꿈꾸는 계획 중에는 못 가는 곳이 없는 Jeep를 타고 전국의 숨겨진
바다를 찾아다니며 영상으로 기록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고 싶단다. 또 서퍼로서는 파도를 탓하지 않고
어느 파도든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지 않고, 파도 안이 아닌 파도 밖에서 카빙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술을 익혀서, 파도 밖 조준희로 우뚝 서는 꿈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봄눈이 걸쳐져 있는 모래사장을 향해 끝도 없이 밀려오는 파도들은 꽤 높고 거칠었다. 일반인의 시선으론 파도 타기 좋은 날이다 싶었으나, 프로 서퍼 조준희의
시선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서핑 전 바다를 향해 서서 한참을 살피고 또 살폈다. 그의 어깨에 묵직한 인내심이 보였다. 웨트슈트를 입고 부지런히 패들링해
진입한 바다에서도 파도를 고르고 또 골랐다. 알고 보니 그는 파도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파도와
대화하고 있었다.
서퍼의 기량과 기술도 중요하지만 바다 위에서만 펼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나서 파도 끝에서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Jeep도 그렇지 않던가. 더
이상 길이 없어도 그 끝에 마주한 자연과 타협하고 곁을 내어주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말이다. 서로
닮은 꼴인 이들의 행보를 반드시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언제까지 서핑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80살까지도 거뜬하지 않을까요?’라며 환한 미소로 답한다. 파도를 보고 바다를 보는 눈이 있다면
운동이 아닌 요령으로 충분하다면서 말이다. 26살의 프로 서퍼 조준희,
이미 삶도 국가 대표급이다.